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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건강칼럼] 화(火病)를 달고 사는 사람들

등록2024-03-31 조회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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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대전대학교 천안한방병원 중풍뇌신경센터 / 내과센터 김윤식 교수

매섭게만 느껴졌던 동장군의 기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그라 들고 이제 꽃들의 향연을 즐길 수 있는 4월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꽃들과의 만남이 설레이고 즐겁지만, 한편으론 봄의 불청객 즉 산불에 대한 미디어의 소식이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 그리고 무섭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삐~~~뽀, 삐~~~뽀, 삐~~~뽀”

필자가 근무하는 병원의 진료실은 요즘 분위기가 119 소방서다.

무슨 얘기냐고?

최근 불을 꺼달라는 환자가 부쩍 늘어서다.

바로 ‘화병(火病: hwa-byung)’ 때문이다.

화병은 다양한 신체증상을 동반하는 우울증의 일종으로, 우울과 분노를 억누르기 때문에 발생한 정신질환으로 정의하고 있다. 보통 응어리(한: 恨)과 억울함, 분한 감정을 수반한 우울감과 가슴 답답함, 열감, 치밀어 오름, 명치에 무엇인가 걸려 있는 느낌을 주로 호소하며, 식욕저하, 소화불량, 불면, 몸 전체의 통증, 가슴 두근거림, 호흡곤란 등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며칠 전 방문한 70대 할머니 이야기다.

할머니는 전신통증과 소화불량, 불면으로 수년째 정형외과, 통증의학과,정신신경의학과를 다니다가 본원을 내원하게 되었다. 필자가 진찰을 하고 복진(腹診)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명치끝을 눌러보니 엄청 심한 통증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할머니, 무슨 화를 이렇게 많이 가지고 계세요?”

할머니는 벌써부터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한다.

“말로 다하면 끝이 없어요. 아무도 이해못해요.”

현재 약 3주 정도의 치료가 진행중으로, 할머니의 증상은 많이 회복되었 고 그날부터 할머니는 필자의 광팬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 화병의 증상은 자칫 상세불명의 통증증후군이나 불면증, 기능성 위장장애, 만성 긴장성두통, 역류성식도염, 혹은 꾀병으로 오해하기 일쑤이기 때문에 환자 자신은 얼마나 힘들고 괴로울지 상상이 된다. 혹시라도 가족이나 지인들이 옆에서 동조해주지 못한다면 억울함이 배가될 것이 자명하다.

화병의 원인은 일반 우울증과 마찬가지로 한마디로 ‘스트레스’이다. 한국특유의 문화적인 배경에서 시작된 억눌림, 억압에 대한 적당한 분출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정신건강의학과의 진단 체계(DSM-IV)에서는 화병을 문화관련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의 하나로 정의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화병이라는 말은 세계보건기구에 수출(?)한 유일무이한 한국어 질환명이 아닐까 싶다. 현재는 많이 변했다고 생각되지만 60~80대 독자들이나 어머니 세대에서는 누구나 가졌을법한 질병이라고 생각하니 멍먹함이 가슴으로 전해지는 느낌이다.

예로부터 한의학에서는 울구화화(鬱久化火)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했는데, 이는 간기울결(肝氣鬱結 : 스트레스가 쌓여 풀리지 않는다는 의미)이 오래되면 화(火)가 발생한다고 뜻이고, 화병의 원인에 대한 평가가 현재와 동일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싶다.

화병의 진단은 병력청취가 최우선이다. 증상의 청취를 듣고 환자의 생활상을 조금스럽게 풀어나가다 보면 스트레스의 원인을 판단할 수 있고, 신체증상과 우울감의 정도를 파악하여 화병이라는 진단을 하게된다.

화병의 진단은 MRI나 CT로 확진이 가능한가? 아니다. 간단한 화병 설문평가도구를 확인해보고 작성해보면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화병의 치료는 약물치료를 우선하고 있다. 보통 항우울제가 사용되고, 각각의 증상에 맞춰 대증치료를 병행하게 된다. 또한 정신치료, 즉 스트레스를 대처하는 방식, 대인관계, 성격 등의 변화를 통해 돌파구를 찾는 것이 일반화되어있다.

한의학에서는 화병을 치료함에 있어 침과 한약, 향기요법 등을 사용한다. 특히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줄이는 심경(心經: 12경락 중의 하나)위주의 침치료와 기울(氣鬱)을 풀어주는 소요산(逍遙散: 기가 잘 놀게한다는 의미를 내포), 소간해울탕(疎肝解鬱湯), 천왕보심단(天王補心丹)이나 주요처방에 향부자(香附子), 시호(柴胡), 소엽(蘇葉), 곽향(藿香), 황련(黃蓮) 등의 약물을 가미하게 되면 환자의 치료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주중에 비가오면 산불위험지수가 낮아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는 보도를 보고있노라니 필자의 마음이 화병 할머니에게 향하게 된다.

“할머니, 제가 불 꺼드릴께요.“